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망이·망소이의 난 (문단 편집) === 최종 진압 === 2월 10일, 망이가 재차 반란을 일으켜 [[예산군|덕산]](德山)에 있는 가야사를 약탈했다. 19일에는 남적이 [[여주시|황려]](黃驪)와 [[진천군|진주]](鎭州)를 노략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에서는 이번에야말로 반란을 뿌리 뽑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29일, 가야산에 웅거하던 손청이 붙잡혀 처형당했다. > 망이(亡伊) 등이 홍경원(弘慶院)[* [[천안시|직산]](稷山)에 있던 절.]에 불을 지르고 절에 있던 승려 10여 인을 죽였으며, 주지승(住持僧)을 위협하여 서울로 글을 가져가게 하였다. <그 글의 내용은> 대략 말하기를, "이미 우리 고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안무(安撫)하더니, 돌이켜 다시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러 와서 우리 어머니와 아내를 옥에 가두었으니 그 뜻은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칼날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王京]까지 가고야 말겠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권19, 명종 7년 3월 신해 망이의 글에서 몇몇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무신들은 노약순과 한수도 사건에서 불만을 가진 기성 세력과 망이, 망소이 세력이 연대할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남적과 일단 강화를 맺은 다음 그들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망이와 망소이 세력은 [[아산시|아주]](牙州)를 함락한 뒤 [[청주시|청주]] 관할 군현까지 휩쓸었지만 정작 청주목은 어쩌지 못했다. 조정은 5월에 관리를 파견하여 남적 토벌에 관한 전공의 다소를 심사하고 조서를 내려 충순현의 이름을 삭제했다. 이것은 이즈음 토벌이 완료되었다는 의미이다. 6월에 마침내 망이가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7월에는 병마사 정세유가 망이와 망소이를 체포해 청주의 옥에 가두고 승전 보고를 올렸다. 이로써 망이와 망소이의 난은 종식되었다. 이후 망이와 망소이의 처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난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서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